
| GMRC 신간 소개 (대학지성 <북캐스트>) | |
| 조회수 : 401 | 등록일 : 2025-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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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학지성 In&Out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83)
경계 위에서 구축된 배제와 공존의 기억들 ■ 책과 테제_ 『유럽의 국경사: 배제와 공존의 역사』 (차용구 지음, 한울엠플러스, 320쪽, 2025.08)
기존 국경 연구는 흔히 침략과 저항, 문명과 야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낡은 담론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해 왔다. 전통적 국경사 서술 또한 이른바 ‘영토의 덫(territorial trap)’에 갇혀 국경을 불변의 실체로 간주하고, 그 영속성과 완결성을 전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에 반해 최근의 비판적 국경 연구는 국경을 고정된 경계선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담론적으로 구성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국경은 권력과 정체성이 교차하는 장으로서 끊임없이 협상·변형·도전받는 공간이며,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유동적·관계적·과정적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단순한 연구 주제의 확장을 넘어, 경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 자체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하며, 이는 사학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들어 포스트식민 이론(postcolonial theory)은 학문 제도 속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학문 내부의 진전이라기보다, 국제적·사회적 전환과 긴밀히 맞물린 결과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로 냉전 구도가 종식되었고, 1993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기점으로 유럽 통합이 가속화되었으며, 동시에 세계화(globalization) 담론이 급부상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 질서의 해체와 더불어 새로운 세계 질서와 정체성을 설명할 이론적 틀이 필요함을 보여주었다. 제국과 식민의 관계를 비판하고 세계화가 내포한 불평등과 권력의 비대칭성을 드러낸 포스트식민 이론은 이러한 전환기를 성찰적으로 해석하는 유력한 분석 틀로 간주되었고, 1990년대 학문 제도 속으로 본격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전환은 발칸 전쟁과 소련 해체 이후 동유럽에서 폭발한 민족 갈등 속에서 국경과 정체성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현실과는 괴리를 드러냈다. 이는 포스트식민 담론이 여전히 서구적 추상성에 치우쳐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경과 정체성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재구성하려는 새로운 학제적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서구 중심의 추상적 경계 담론은 지역적·미시적 분석으로 확장되었으며, 국가와 민족 경계의 불안정성, 혼종성, 그리고 디아스포라 경험이 핵심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특히 메리 루이즈 프랫(Mary Louise Pratt)과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úa)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각각 라틴아메리카와 미·멕시코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국경과 정체성의 재구성’을 설명하는 유의미한 해석 틀을 제시하였다. 비판적 경계 연구의 인식론적 전환은 더욱 구체화되었으며, 에띠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국경을 고정된 ‘정치적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자 제도적 장치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동시에 열리고 닫히는 유럽적 양면성을 지적하였다. 그는 유럽, 나아가 유럽연합(EU)의 팽창을 “국경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강화하는 이중적 과정 속에 있는 공간”으로 파악하였다. 안시 파아시(Anssi Paasi) 역시 핀란드–러시아 국경과 지역 정체성의 제도화 과정을 분석하며, 국경을 단순한 선(line)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고 재생산되는 담론적 실체로 규정하였다. 여기에 호미 바바(Homi Bhabha)의 ‘제3의 공간(third space)’ 개념이 이주자와 소수자 연구와 결합되면서, 1990년대의 경계 연구는 지도 위 경계선이 아니라 정체성·담론·권력 관계가 교차하는 복합적 장으로 국경을 사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분석의 지평을 유럽과 구대영제국에 국한함으로써 여전히 서구중심주의적 한계를 노정하였다. 2000년대 들어 월터 미뇰로(Walter Mignolo)와 아니발 키하노(Aníbal Quijano) 등이 제기한 데콜로니얼 이론(decolonial theory)은 경계 연구를 라틴아메리카의 관점과 긴밀히 연결하였다. 포스트식민주의가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 경험과 텍스트 분석에 초점을 두었다면, 데콜로니얼 이론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경험과 그로부터 비롯된 권력 구조의 지속성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근대/식민 세계체제(modern/colonial world-system)”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유럽의 근대성이 식민 지배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탈식민화가 진행된 오늘날에도 이러한 구조는 해체되지 않은 채 세계화 담론 속에서 재구성되어,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경 질서를 통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데콜로니얼 관점에서 국경은 단순한 영토적 경계가 아니라, 식민성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권력 장치이자 제도로 이해된다. 국경은 이주민 통제, 난민 관리, 무역 불균형이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장소로서 인종적·경제적 위계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곧 “식민성의 현재적 표현”으로 기능한다. 이에 대해 월터 미뇰로는 ‘경계 사유(border thinking)’라는 개념을 통해, 국경 지역에서 생성되는 혼종적 지식과 탈중심적 시각을 서구 보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하며, 국경을 지식 전환의 공간으로 재정의하였다. 이 책의 집필에는 국경을 둘러싼 최근의 일련의 사건들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같은 초국가적 재난은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운 정책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인접 국가와의 협력이야말로 확산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길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 결과 국경을 군사적 요새나 정치적 장벽이 아닌 공생의 교량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고, 이는 곧 국경을 둘러싼 기억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특히 초국가적·초영토적 기억 연구는 국경을 과거의 갈등과 폭력이 재현되고 동시에 협력과 연대의 가능성이 생성되는 장소로 조명한다. 이러한 접근은 기억 연구가 주로 민족국가 내부의 경험과 서사에 머물러 온 한계를 넘어, 경계와 이동, 교차와 혼종의 차원에서 기억의 형성과 전승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경계 연구(border studies)와 기억 연구(memory studies)의 접합은 국경을 둘러싼 역사적 경험과 집단적 기억을 새로운 인식론적 틀 속에서 재해석하게 하는 중요한 학제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경을 가로지른 일상의 궤적을 추적하고, 민족국가의 ‘컨테이너’로 설정된 경계를 넘나든 초국가적 요소와 네트워크를 탐구하며, 영토적 범주를 넘어 생성된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는 역사를 위로부터뿐 아니라 아래로부터도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국경사: 배제와 공존의 역사>는 이러한 방법론적 전환을 토대로 국경지대에 덧씌워진 허위와 오해의 그림자를 걷어내고자 한다. 총 28개의 국경을 다루면서 유럽과, 더 나아가 유럽이 만들어낸 세계의 국경들을 중심으로 경계의 역사를 풀어낸다. 국경 개념을 산출한 유럽은 유럽연합의 출범과 함께 초국경적 통합을 이루었고, 솅겐 체제 속에서 개방된 국경은 과거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이동과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한반도를 비롯한 비서구 지역에서는 서구 열강이 임시적이고 자의적으로 획정한 분계선의 유산이 여전히 상처와 갈등을 남기고 있다. 식민주의 시대가 종식된 뒤에도 ‘제국이 만든 국경’은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저자는 ‘세계화의 폭력’이 서구 제국주의가 강제적으로 구축한 국경의 구조 속에 깊숙이 내재해 있음을 지적한다. 국경은 본질적으로 가변적인 사회적 산물이기에, 이를 단순히 ‘고정된 선’으로 환원하는 일차원적 시각을 넘어서는 다층적 국경경관(borderscape) 개념으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나아가 이 책은 세계 각지의 국경을 근원적 시선에서 조망하며, 경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접경지대에 얽힌 다채로운 서사를 풀어낸다. 영문 번역본은 스프링거-팔그레이브 맥밀란(Springer- Palgrave Macmillan) 출판사를 통해 출간될 예정이다. 출처 : 대학지성 In&Out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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